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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7.주일말씀(마태복음20장29~34절, 두 맹인의 믿음)

by 일하는 목사 2024. 11. 17.

(본문)

마 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마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 20: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도입)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물론 모든 말씀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오늘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19-20장 전체의 결론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읽지 않으면 오늘 본문은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단순한 말씀같지만. 실제 19장부터 등장하는 모든 사람과 대조되는 두 사람이 됩니다. 자세히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 바리새인 vs 두 맹인의 대조

바리새인이 어디에 등장하는가?  19장 3-12절에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의도는 3절에 있습니다.

마 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예수를 넘어트리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방법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해석을 통해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혼증서 써줘서 이혼해도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침례요한의 목베임의 이유는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을 했고 침례요한이 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혼을 금지하고 책망하면 침례요한과 같이 목베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께서 이혼을 허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말씀하신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몸이 된 것입니다. 결코 나눌 수 없다는 말씀을 위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이 찾아온 의도는 넘어트리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의도입니다. 

바리새인의 악한 의도 vs 두 맹인이 예수를 찾은 의도
너무나 다른 의도입니다.

* 두 제자 vs 두 맹인의 대조

마 19:13 제자들은 아이들이 예수께 나가는 것을 꾸짖는 말씀.
마 20:31 두 맹인이 예수께 나오는 것에 대해 꾸짖음 당하는 말씀.

왜 제자들은 아이들이나 맹인들이 예수께 나올 수 없다고 여겼을까요? 적어도 예수님을 만나려면 자기들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아이들처럼 천하게 여겨지거나 맹인들처럼 장애를 가져 당시 죄인처럼 여겨지던 사람들은 안된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나, 뭔가 되는 사람들 말입니다.
특히 두 제자와 두 맹인의 대조가 마태복음 20장 20-28절입니다.

그런데 세 배대의 두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왜 나왔냐? 예수님 옆자리 달라고 나온 것입니다. 맹인은 옆자리가 아니라, 잠시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지만, 두 제자는 당당히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오랜기간 예수님의 옆자리를 차자하려고 탐합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진 두 맹인과 교만한 두제자의 대조입니다. 

* 수 많은 무리 vs 두 맹인의 대조

무리들이 누구인지 보셔야 합니다. 당시는 유월절 축제기간입니다. 유월절부터 오순절까지 신앙이 깊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셨고 그의 주변에는 많은 무리들이 길을 갑니다. 그 길에서 유명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기적도 일으키고 귀신도 쫓아내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근처에서 함께가면서 계속 그 모습에 흥미를 갖고 보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은 없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참된 믿음이 없다고 말할까요? 바로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무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맹인은 어땠을까요? 이들은 절박한 사람들,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무리와 같은 흥미나 호기심이 아닌 인생이 걸리고, 절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0절에 보면, 가신다 함을 듣고 어떻게 하죠? 소리 질러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예수님이 정말 필요합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에게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꾸짖음을 당합니다. 여기서 꾸짖다는 말은 비난을 받다는 말입니다. 책망을 받다는 말입니다. 두 맹인은 주님을 불렀는데 책망을 받았어요.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간구했는데 책망을 받았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간절히 주님을 불렀습니다. 두 맹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더 크게 소리지
이때, 예수님이 멈춰서십니다. 혹시 크게 소리질러서 예수님께서 아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모르셨을까요?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다 알았습니다. 근데 왜 더욱 큰  소리로 지를때까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더욱 간절히 외치고 포기하지 않고 외치기를 기다린 것.
 

(마무리)

결론은 이렇습니다. 두 맹인은 육신은 맹인이지만 영안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수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눈은 보이지만 영적으로 맹인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단 무리들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제자들도, 그리고 수 많은 무리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적으로 맹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 수 많은 무리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영적인 눈이 어두울 수 있지만, 영적인 눈을 뜨게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