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눅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눅 11: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러분은 식사초대를 받아보셨습니까? 요즘에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서 식사대접을 하는 경우들이 흔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종종 있었습니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한 파였던 바리새파의 한 지도자가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를 했습니다. 정치를 보면 보수당이 있고 진보당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크게 두 개의 파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하나는 바리새파이고 다른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두 개의 파가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는데 대중들의 지지를 받은 파는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점심식사 자리에 초대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기 위해 갔습니다. 식사를 할 때 모든 나라는 그 나라만의 식사예절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음식을 남겨야 되는 나라가 있고, 어떤 나라는 음식을 더 달라고 해야 하는 나라도 있고, 기침을 하면 안 되는 나라가 있고, 방귀를 뀌면 안 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는 먹고 트림을 해야 하는 문화권도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도 식사예절이 있는데...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 율법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구약 율법에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만 한다는 율법조항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전통적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의 전통, 곧 유전이라고 합니다. 율법에 없지만 마치 율법처럼 유대사회에서는 반드시 지켜지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씻지 않는 행위는 마치 율법을 어긴 것과 같은 취급을 받다는 거예요.. 율법이 아닌데 율법처럼 전통을 만들어 보린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합니다. 그러자 식사초대를 한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 함께 38절을 읽겠습니다.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아마도 이 바리새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저 예수라는 사람은 분명 유대인인데 우리의 율법과 같은 전통을 알고 있을 텐데 손을 씻지도 않고 식사를 하다니. 저 예수는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풍습이요 우리의 문화요, 하나님말씀처럼 지켜지고 있는 우리의 전통을 모르는 사람이야. 어떻게 저 사람이 메시아이고 우리에게 샬롬의 나라를 선물해 줄 사람이야. 말도 안 돼”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꿰뚫고 있던 예수님께서 39절에 말씀하십니다.
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39절의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은 차려진 이 잔과 접시들처럼 아주 깨끗하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은 39절 말씀처럼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하다. 너희들은 옷도 깨끗하고, 집도 깨끗하고 먹는 음식도 모두 깨끗하지만 정말 깨끗해야 할 너희들의 마음은 너무도 더럽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40절에 말씀하십니다.
눅 11:40 어리석은 자 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어떠신가 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도 만드셨지만 사람의 속마음도 만드셨다는 것을 너희는 기억해라. 그러면서 한 가지 권면을 합니다. 뭐냐? 41절입니다.
눅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1절에서 몇 가지 단어를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안이라는 말은 그릇 안에 있는 것입니다. 풍성하고 화려한 음식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부유했고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가난하고 헐벗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그릇 안에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구제해라. 손을 씻고 네가 먹으려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깨끗하게 된다고 합니다. 손을 씻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 손을 펼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42절에 말씀합니다.
눅 11:42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구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 것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입니다. 말하자면 주요 수입원이 되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박하, 운향,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이렇게 철저히 드린다고 자랑을 합니다. 율법이 말하지 않은 것도 나는 한다는 거지요. 이것은 자기 자랑이요 자만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 연약한 사람들을 향한 공의로움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미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박하, 회향, 채소의 십일조도 드리고, 공의와 사랑도 행하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박하, 회향, 채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하기에는 조금은 껄꺼러운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둘째, 이것과 저것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해석입니다. 사회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그들을 향해 공의롭게 공정하게 대해 주라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상관없이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자신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들에게 뭐가 빠져있었습니까? 공의와 사랑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냉철한 잣대를 내밉니다. 특히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더욱 차갑게 대합니다. 공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도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에는 바쁘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식어버린 시대입니다. 이번 한 주를 살아갈 때, 바리새인들의 행위에서 돌아서서 사랑과 공의로 충만한 한 주가 되길 소망합니다.
- YouTube
www.youtube.com
'한 주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부활, 내 부활(마가복음 16장 1~13절) (0) | 2024.03.31 |
---|---|
종려주일(요한복음12장12-13절) (0) | 2024.03.24 |
두 자매(누가복음 10장 38-42절) (0) | 2024.03.10 |
유대에서 만난 세 사람(누가복음9장57~62절) (0) | 2024.03.03 |
특별한 경험(누가복음9장28~36절) (1) | 2024.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