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누가복음 19장 28~44절)
오늘의 본문은 누가복음 19장 28~44절입니다.

(도입) - 왕의 책 외규장각의궤
외규장각의궤는 정조 때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짓고 보관했었는데 이 책이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의 외규장각의 책 5천 권을 불태우고 외규장각의궤를 포함한 340권을 약탈해서 가져갑니다. 그런 중 1979년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이 그 책을 찾아 가치를 입증하여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2011년 11년 전 이 외규장각의궤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어, 몇 년 전 국립박물관에 전시를 했었습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이냐? "왕의 책"이라고 불리는 297권의 책입니다. 이 책은 왕과 관련된 행사를 할 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책입니다. 왕의 행차할 때 그 모습을 정말 섬세한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왕이 왕궁에서 나갈 때, 왕이 들어올 때 모든 절차와 의식을 그림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왕을 왕으로서 공경하며 그 예를 다하여 왕을 모시는 행위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왕으로서 공경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질문) 조선시대의 왕의 행차에도 이 정도로 큰 축제를 열고, 수많은 병사들과 신하들이 동행했다면 로마시대에 로마황제의 행차에는 어떠했을까요? 특히,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왕궁으로 입성할 때는 과연 어떤 극진한 환대가 있었을까요?
특별히 평화의 왕이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어떠해야 할까? 그 백성들은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환대해야 할까요?
(메시지 1) 겸손의 왕 예수님
눅 19:30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중요한 문구 두 곳을 보겠습니다.
첫째, '아직도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 이 문구의 의미는 순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연약한이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연약한 이라는 의미는 초라한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둘째, '나귀새끼'입니다. 나귀새끼는 힘이 없는 연약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왕이 타는 동물이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다 큰 힘 좋은 나귀도 아니고 새끼 나귀입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을 정도로 아직 어린 나귀입니다. 순전한의 의미가 아니라 연약하고 초라한이라는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슥 9:9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본문에서 3중 강조가 나옵니다. 강조1-나귀입니다. 강조2-작은 나귀입니다. 강조3-나귀 새끼입니다. 몇 번을 반복합니까? 3중 강조입니다. 즉, 정말 연약하고 형편없는 나귀라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그 소유권을 보십시오. 그것도 예수님 소유가 아닙니다. 제자들 나귀도 아닙니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사람의 나귀새끼
전환 :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찬양하는 사람들)
눅 19: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사람들이 뭘 하죠? 찬양을 합니다. 이름을 높입니다. 땅에는 평화요 하늘에는 영광이라고 찬양합니다. 사람들의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입니까? 제자의 온 무리라고 합니다. 제자 밖에 없어요. 제자들만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당시 황제의 입성과 너무나 큰 대조가 됩니다.
황제는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황금마차를 타고 수많은 군인들과 함께 입성합니다. 그러면 모든 로마시민들이 나와서 환호를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로마의 모든 백성들이 로마 도시 밖에까지 나와서 환호를 합니다. 그 황제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환호하는 수 많은 귀족들이 있습니다.
(명확한 대조)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은 어떤가요? 만왕의 왕이며 예루살렘의 왕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연약하고 초라한 나귀새끼,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계십니다.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전부입니다. 정말 빈약하고 초라해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연약하고 볼품없이 입성하실까요? 두 개의 본문의 공통점을 찾아보겠습니다.
슥 9:9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마 21:5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평화의 왕 예수님의 공통점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의 왕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는 이유는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메시지 2) 긍휼의 왕 예수님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장면은 신약성경에 두 번 기록됩니다. 오늘 본문과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11장에서의 예수님의 눈물)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배경) 마리아의 오빠가 죽었고. 그 죽음 앞에 예수님께서 눈물흘리 십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사랑하셨구나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눈물의 의도를 제대로 모르고 한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지만 나사로가 죽어서 눈물 흘리셨다기보다는 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로 인해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백성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를 때 우셨다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눈물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눅19장에서의 예수님의 눈물)
눅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배경) 어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소리치고
평화의 왕이고 영광의 왕이라고 소리치니 매우 불쾌합니다. 신성모독이라고 여기고 질문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당신이 위대하고 뛰어난 스승이라면 인정하겠지만, 평화의 왕/영광의 왕은 ㅇ아니지 않습니까? 제자들을 책망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십니다.
눅 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나의 제자들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 이들의 말이 맞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행동을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눈물을 설명합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설명)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예루살렘 성은 본래 평화의 땅이요, 영광의 땅,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땅의 본래 주인이 예수님. 예수님이 지금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왕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이를 오늘날로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데.. 예수님을 모른다거나, 교회를 다니는데 자신의 왕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눈물은 요한복음 11장에서도 백성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함에 눈물을 흘리셨고, 누가복음 19장에서도 예루살렘의 왕 되신 평화의 왕을 모르고 살아가므로 고난당할 것을 안타까워하신 겁니다. 백성들의 믿음 없음과 자신의 왕을 알지 못함에 대한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
(마무리)
1. 예수님은 겸손의 겸손하셨습니다. 왕이지만 겸손하셨습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겸손히 조용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2.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도 모르고,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긍휼 하심의 눈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압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선한 능력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제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 심의 선한 능력을 주옵소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실천하고, 긍휼 하심을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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